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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두 저작은 인문도서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가장 많이 출판된 책의 반열에 속한다. <공산당 선언>은 약 100개 언어 이상으로, <자본>은 약 7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되었다. 이들 두 저작은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 엥겔스의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원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외국어본들도 모두 수없이 중판을 거듭하였다. 이들 두 저작은 온갖 형태의 묶음책, 즉 “선집”, “연구 선집”, “역사적 비판적 전집” 등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들 두 저작의 다양한 판본 50권씩이 전시된다. <공산당 선언>은 20개 언어, <자본>은 12개 언어의 판본들로 구성된다. 특히 엥겔스가 편집한 <자본> 제1권~제3권은 모두 초판본(1883년, 1885년, 1894년)이 전시되어 이번 전시회의 중심을 이룬다.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의 초판본들은 파리, 브뤼셀, 런던, 뉴욕, 라이프치히, 베를린, 함부르크, 취리히에서 발간되었고 나중에는 슈투트가르트가 여기에 추가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아있는 동안 직접 손을 보아 출판한 개별 단행본은 모두 12권이었다. 마르크스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와 자신의 저작을 계속 출판하는 책임을 맡았다. 엥겔스는 해설을 곁들인 자신의 서문을 붙여 많은 개별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물론 두 사람의 저작을 모두 망라하는 “전집”을 그가 직접 발간할 수는 없었다. 전집을 발간하는 이 과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제자들”, 즉 독일 사회민주당의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 아우구스트 베벨, 프란츠 메링 그리고 러시아 망명자였던 다비드 리야자노프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의 출판은 이들의 사상을 수용해온 역사, 즉 19세기 독일은 물론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주요한 몇몇 사건들을 상기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결성(이 동맹으로부터 위임받아 <공산당 선언>이 1847/48년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페르디난드 라살에 의한 전국독일노동자동맹의 설립(1863년, 라이프치히), 국제노동자연맹(마르크스가 의장 취임연설을 했던)의 결성(1864~1872년, 런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결성(1875년 고타에서 두 정파가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나중에 마르크스가 이때의 강령에 대한 비판을 출판하였다), 파리코뮌(1871년—국제노동자연맹 총회에서 마르크스는 이 사건을 분석한 “프랑스 내전”을 연설하였다), 비스마르크와 독일의회가 독일사회민주당의 정치적 활동을 극도로 억압하기 위해 선포한 “사회주의자법”(1872~1890년), 제2인터내셔널의 결성(1892년, 파리) 등등. 이들 많은 사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즉 <자본> 제1권이 4개의 독일어 판본으로 발간되었고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엥겔스의 <반 뒤링>과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은 마르크스주의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자 독일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 엥겔스 유고의 상속자로서 다수의 편집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 첫걸음은 당 간부회의 위임을 받아 프란츠 메링이 1902년 디츠 출판사에서 간행한 4권의 선집이었다. 1905~1910년 동안 카를 카우츠키는 엥겔스가 살아있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아 마르크스 유고의 해독에 착수하였던 <잉여가치론>을 세 권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이것은 이후 마르크스 엥겔스의 방대한 자필 원고를 출판하게 되는 출발점을 이루었다. 1913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편집을 맡은 <마르크스 엥겔스 서한집>이 4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서한집은 당의 이해와 원본의 완전성을 추구해야 하는 편집 작업 사이의 긴장관계를 최초로 보여주었다. 베벨, 카우츠키, 메링 등은 서한의 내용이 빠짐없이 그대로 출판될 경우 거기에 등장하는 특정인에 대한 불신이 드러날 수 있고 이것이 당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베른슈타인의 처음 생각과는 달리 편지들은 아무런 기준도 제시되지 않은 채 교열을 거쳐 일부를 줄이거나 상당 부분을 아예 누락하는 형태로 결국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이런 형태의 출판이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제1차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구 MEGA)의 제3부에서 서한집이 출판된 다음에야 비로소 이 논쟁은 소멸되었다.

그밖에 카우츠키는 1914년 <자본> 제1권의 보급판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에는 편집자의 방대한 서문과 리야자노프가 작업한 문헌, 인명, 사항 색인이 수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17년 리야자노프는 1850년대에 집필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글들을 두 권으로 모아 편집한 선집을 출판하였다. 여기에서 언급한 판본들은 모두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소련의 등장 이후 이루어진 노동운동 진영의 분열은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의 편집 활동에도 분열을 가져왔다. 한편으로 서방의 사회민주당에서는 주로 카를 카우츠키와 그의 아들인 베네딕트 카우츠키가 편집 작업을 주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모스크바에서는 1921년 리야자노프가 이끄는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1924년 이 연구소와 국제적인 공동작업자들을 결합하여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을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발간할 것을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리야자노프의 관계에 힘입어 국제적으로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의 모든 유고와 독일 및 국제 노동운동의 많은 문서들이 모스크바 연구소를 위해 복사되었다. 이들 엄청난 분량의 문서는 MEGA 작업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 원고가 출판되었고 그에 뒤이어 마르크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그리고 나중에 <경제학 비판 요강>이 연이어 출판되었다. 이들 출판의 모든 초판본이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된다.

소련에서 스탈린의 억압체계가 시작되면서 리야자노프가 체포 구금되고 모스크바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소의 잘 훈련된 공동작업자들이 해고되었고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의 편집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스탈린주의의 틀로 점차 교조화되었다. 제1차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구 MEGA)은 중단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자 진영과 사회민주당 진영 사이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예를 들어 <자본>과 기타 정치적 저작들)의 왜곡을 둘러싼 책임 논란이 터져 나왔다. 독일에서 나찌가 통치하던 기간(1933~1945년) 동안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은 금지되었다. 1945년 이후 이들의 저작에 대한 편집은 새로운 출발점을 이루었다. <공산당 선언>의 몇 가지 판본들이 그런 사례를 보여주는데 이 전시회에서는 이들 판본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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